세상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글쓴이 김혜남 (김혜남정신분석상담소)

세상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학창시절 나의 등하교 길은 종종 뿌연 최루탄 가스를 뚫고 가야하는 고역의 길이었다. 우리 집은 고려대학교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으니 최루탄 가스는 어릴 적부터 견뎌야 할 생활의 한 조건이기도 했다. 그런 불안정한 사회에서 보내야 했던 나의 예민한 사춘기는 방황과 혼돈 그 자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매운 안개 속에서 다짐한 적이 있다. 내가 고 2쯤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세상은 흉흉했고 사람들은 "뭐가 어떻게 되려나보다."라며 숨죽여 속닥거렸다. 나는 이런 분위기에서 꿈 많아야 할 내 청소년기를 보내야 하지만 내 자손들에게는 이런 사회를 절대로 물려주지 않겠다던 게 당시 나의 다짐이었다. 내 자손들에게는 마음껏 꿈을 꿀 수 있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푸르게 펼쳐지는 그런 세상을 물려주겠다고.

그러나 난 지금 소수의 환자들만을 치료할 수 있는 정신과 의사가 되어 있다. 그리고 청소년기를 막 지나거나 지나고 있는 나의 아이들에게 마음 놓고 그들의 끼와 희망을 내뿜고 내달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지도 못한 쉰을 바라보는 초로의 아줌마가 되어 있다.

나의 아이들에게는 더 좋은 세상을 남겨주겠다던 나의 다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꿈을 얘기하기보다는 당장 눈앞의 성적에 근근해야 하는 아이들, 오로지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목표라고 가르치는 불신의 세상을 그네들에게 만들어준 무능력하고 비겁한 어른이 바로 현재의 나의 모습이다.

요즘의 청소년들은 세상을 믿지 못한다. 세상을 알기도 전에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아이들은 세상에 대한 냉소와 분노로 삶의 목표를 잃고 방황한다. 그리고 미래를 믿지 못하는 아이들은 현재의 쾌락에 탐닉한다.

작년인가 일본의 한 청소년 연구소에서 세계 각국의 청소년들의 삶의 목표를 조사한 일이 있었다. 일본의 청소년들은 "좋은 친구 사귀기"를, 중국 청소년들은 "부자 되기"를, 미국 청소년들은 "안정된 가정 꾸리기"를, 그리고 한국 청소년들은 "즐기기"를 인생의 목표로 들었다. 미래를 설계하고 꿈을 꿔야 할 청소년들이현재를 즐기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들다니. 누가 그들에게 미래를 빼앗아갔는지,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현재 우리나라 사회가 예측불가능하고 미래에 대한 비젼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의 쾌락은 공허와 우울만을 남긴다. 왜냐하면 사람은 의미를 찾는 동물이고, 그런 의미를 찾아야만 자신이 이 세상에 중요한 사람이란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청소년들보다는 30년 이상의 세월을 더 살고 보니 그래도 이 세상은 살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세상은 정말 살만하고 우리의 에너지를 투자할 가치가 있는 곳이다. 왜냐하면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물론 이기적이다. 그러나 극한 상황이나 위험한 상황에서는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뛰어드는 게 바로 우리 자신이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멸망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생 선배로서 난 나의 아이들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세상은 충분히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세상은 너희들이 믿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그리고 너희들이 만드는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인생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화의 중심부에 바로 미래를 향해 꿈틀대는 청소년들이 있는 것이다.

[출처: 십대들의쪽지 235번째 이야기 中에서 http://www.teen4u.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