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서울시립 보라매병원에서 이모(54) 씨는 병원비 감당이 어렵고, 치료를 계속해도 회생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의사 진단에 따라 응급 뇌수술을 받고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던 남편 김모(당시 58세) 씨의 퇴원을 요구했다. 의료진은 병원측에 법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고 입원 이틀만에 김씨를 퇴원시켰다. 하지만 김씨가 구급차로 집에 옮겨진 뒤 5분만에 숨지면서 형법 상 논란에 휩싸였다.
7년간 공방을 거친 끝에 2004년 8월 대법원은 "담당의사들을 살인방조범으로 본 원심은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이같은 법원 판결들로 인해 그동안 병원들은 환자 보호자가 요구해도 호흡기를 제거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난 28일 서울 서부지방법원 민사12부(부장판사 김천수)는 뇌사상태인 김모(75·여) 씨의 자녀들이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인정해 달라'며 신촌 세브란스병원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인공호흡기 등의 도움없이 환자의 회복 가능성이 낮다는 점과 평소에 보인 환자 본인의 치료 중단 의사를 들어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제한적 범위이지만, 인간이 스스로 자연사할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됐다는 점이며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생명에 대한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인정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이 극심한 고통을 겪는 중환자나 난치병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하는 ‘적극적 안락사’를 인정한 것은 아니며 모든 유형의 치료 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존엄사 남용 위험성 때문에 환자 본인이 아닌 가족의 존엄사 청구권 역시 인정하지 않았다.
현재 의료계는 환영, 기독교계는 반대 의사를 가진 것으로 알려지나 정부, 시민단체, 천주교, 불교 등은 대체로 신중한 반응을 보인다. 찬성 쪽은 생명 결정은 환자 본인의 권리다, 엄격한 제도를 만들면 남용을 방지할 수 있다, 무의미한 연명 치료로 지출되는 의료 비용이 막대하다 등을 주장하는 반면, 반대 쪽은 생명 경시 풍조를 조장할 우려가 있다, 인간 생명 결정은 신의 영역이다, 장기매매 등 상업적 목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 빈곤층이 존엄사를 남용할 우려가 있다 등을 제기하고 있다.
외국에서도 네덜란드가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한 이후 유럽 일부 국가가 비슷한 법안을 만든 반면 프랑스와 독일은 안락사를 엄격히 금지하는 등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조사 대상의 88%가 ‘존엄사’에 찬성한 바 있으나, 이 판결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존엄사의 인정여부와 인정기준 및 남용방지를 위한 조치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법률적 뒷받침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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